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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의 역사



유투브에 '스터디코드'라는 채널이 있다. 서울대를 졸업한 분이 진행하는데 수험생들이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곳의 영상 중 중독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진행자가 하는 말은 이렇다. 중독의 본질이 바로 도피, 회피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지금껏 좋은 습관을 만들거나, 좋지 않은 습관은 자제를 하는 정도의 생각만 해왔다.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긴 했다. 근데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3때 나는 문과 전체중 유일하게 여름 방학때 등교를 거부했다.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하겠다 담임 선생님과 담판을 지어 얻은 결과였다.

그렇게 의기 양양한 출발을 했으나 이상하게 공부가 생각처럼 잘 안됐다. 오전에 잠깐 공부하다 집에 가서 밥을 먹을때만 보려하던 티비 때문에 한시간은 그냥 버렸다.

독서실에 돌아가서는 식곤증 때문에 또 한 시간은 쉽게 졸면서 허비했다.

아 그때 내가 실은 공부가 참 하기 싫었구나, 오랜 시간이 걸려 제대로 알게 됐다.



중독이 꽤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때까지는 공부를 잘했다. 반에서 한 손가락안에는 거의 들었던 것 같다.

집안 핑계를 대고 싶지는 않지만, 초등학교 5년전쯤부터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 때 내 마음은 불안감이 많았던 것 같다. 스트레스도 상당했던 것 같다.

당시 슬램덩크라는 만화가 엄청 인기였다. 나는 살아오면서 책만 엄청 읽어댔지 만화책은 거의 본적이 없었다. 근데 슬램덩크를 시작으로 만화에 취미를 붙였다.

좀 챙피한 얘기지만 부모님 돈을 훔쳐서 만화책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서점에서 만화책을 잠바 안에 너다섯권씩 넣어 훔치기도 했다.

내 방 베란다에는 슬램덩크, 드래곤볼 전집이 있었다. 아이큐 점프, 소년 챔프도 꼬박꼬박 사봤다. 나는 중학교때까지 만화책을 엄청나게 많이 봤다.



중학교 3학년 때쯤 집안 분위기가 정말 심각했다. 나는 심하게 불안했다. 서태지의 1집 영향으로 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스매싱 펌킨스를 알게 됐고, 림프 비즈킷, 크라잉 넛을 즐겨 들었다.

오프스프링이나 위저, 메틀도 조금 듣긴 했지만 사실 좋은지 어쩐지 모르고 들었다.

자기 전에 거리를 오고가며 항상 음악을 들었다. 특히 고등학교 1,2학년 때 내 불안함은 더 커졌던 것 같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그리 좋지 못했다.

열등감과 불안한 나는 모난 성격을 마구 표출했고 음악으로 도망쳤다.

잘 때는 항상 음악을 틀어야 했다. 음악을 틀어놔야 마음이 편했다. 초등학교때 누나와 방을 쓰다 초등5학년 이사를 오며 떨어졌는데 둘다 사춘기로 사이도 좋지 않았다.

외로웠던 것 같다. 혼자 자는게 적응이 안됐던 것 같다. 솔직히 중고등학교를 생각하면 행복했다는 느낌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고3쯤에는 힙합에 빠졌다. 1학년까지 쭈구리였다 2학년때는 모난놈, 3학년때 씨비매스를 알면서 힙합의 간지를 장착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아빠와 이혼한 엄마와 인천으로 올라가는 차안에서 드렁큰 타이거의 2집을 들었다. 뭔가 폼나는 스무살이 될 것 같았다.



스무살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 엄청나게 유약하고 승질만 틱틱부릴줄 알고 사회생활이 엄청나게 서툰 아이였다.

나는 광주를 벗어나고 싶어 인서울 대학으로만 두 군데를 지원했다. 둘다 떨어졌다.

내 실패를 숨기고 싶어 재수할거라고 했다. 하지만 재수를 시작해본 적도 없다. 문제집 한 권을 산 적도 없다. 말만 그렇게 하고 다녔다.

나와 성적이 비슷한 애들도 다 지역의 대학교에 적당히 맞춰서 가고 나름 학교 생활을 즐기며 잘 지내는 것 같았다.

호텔에서 알바를 했다. 돈을 벌며 공부를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루 하루 다니기도 힘들었다. 그 땐 센척 하느라 힘든줄도 몰랐다.

첫 사랑을 만났다. 스물한살 군대 가기전까지, 아니 정확히는 군대서 차이기 전까지 나는 첫사랑에 미쳐있었다.

나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회피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겠지만.





군 전역한 스물셋,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다 퍼주는 너무 감사한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녀의 덕을 보며 같이사는 오피스텔에서 나는 놀고 먹었다.

그 분과 끝난 후에도 또 두 번의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진짜 너무나 무기력했다. 꿈은 컸다. 행동은 아무것도 안했다.



스물 여섯 겨울, 당시 같이 지내던 여자친구한테서 도망치듯이 나와 고시텔로 나왔다. 야반도주같은 건 아니고 ㅎㅎ 미리 얘기하고 이사를 한 것이다.

2년 가까이 많이 싸우고 지쳐있었다. 마음 편하고자 나왔지만 그녀가 싫은건 전혀 아녔다. 헤어지는게 나을 것 같아서 헤어진 것 뿐.

혼자 지내는게 너무 적응이 안됐다. 그리고 아는 사람 없는 타지에서 너무 외로웠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내가 초라했다.

편의점 알바 출근도 못했던 내가 진짜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일이 끝나면 맥주 두어캔씩 꼭 먹고 잤다. 습관이 되서 살던 고시텔에서 10분정도 거리에 있는 편의점까지 또 술을 사러 나갔다.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운동을 시작하고 술을 끊기 전까지 한두달정도 매일 맥주를 마셨다.

살아내야 하는 하루 하루의 압박감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것 같다.


청소년기의 만화책과 도벽, 음악 그리고 첫 사랑, 백수짓, 알콜 중독까지 나는 그때 당면하고 있던 무언가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빠져들 뭔가가 필요했던 것 같다.





오늘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독서와 글쓰기, 할 일들을 빡빡하게 해야겠단 생각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려 했다.

어젯밤 열한시에 자리에 누웠다. 대단치 않게 시작했던 핸드폰을 세시가까이 될 때까지 만지작 거렸다. 유투브도 하고 옷 구경도 하고.

휴, 아침에 일어나서 후회했다. 아니 차라리 그 시간에 운동이나 독서 글쓰기를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맨날 시간 없다고 하면서 안 잘꺼면 차라리 그런 생산적인 일들이나 실컷 하지 그랬냐?
자신에게 따져 물었다.

스터디코드의 중독 영상을 보고 인정하게 됐다.
운동, 독서, 글쓰기 내가 지금 하기 싫구나.

난 옛날부터 해야 할 일을 하기 싫으니 엉뚱한 것들에 중독이 됐었다.

지금이라도 깔끔하게 인정한다.

하기 싫은게 당연하다. 그래도 이루고 싶은 걸 위해서 할 건 해야한다.



일단 내 과업들이 하기 싫다고 인정은 했고, 앞으로는 이것들이 도데체 어떻게 싫은지 좀 잘 들여다봐야겠다.

좀 분석을 해봐야겠다. 그리고 뭔가 파고들 구석을 살펴봐야지.

내가 터득했고 행하고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해야 하는 행위를 하는 준비단계까지만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운동을 한다치면 '운동을 한다'이런 생각하지 말고 운동복을 입고 가방을 챙겨서 철봉앞으로 가는 것까지만 목숨걸고 해보는거다.

가면 어차피 하게 되니깐 말이다.

독서와 글쓰기는 책상을 펴고 책이나 노트북을 펴고 커피 세팅을 하는 것까지만 집중을 하는 것이지.

다른 방법들도 알아보고 또 관련된 글을 써봐야겠다.

사실 지금 이 글도 글쓰기를 습관화하려는 실천이다.

여태 살아온 것처럼 회피는 그만하겠다. 이제 하기 싫은 그것을 당당히 마주해보겠다.